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2 군사반란 (문단 편집) == 여담 == * 당시 미 대사였던 글라이스틴은 육군 장성 30명 정도가 전두환을 제거하는 역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훗날 밝힌 바 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9/1780659_19514.html|#]] 하지만 그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함구했으며, 병력 규모를 얼마나 갖췄는지 파악할 수가 없어 역 쿠데타를 반대했다고 한다. 이는 제5공화국 드라마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묘사된다. * [[노태우]]의 [[처남]][* 김옥숙의 오빠]이었던 [[김복동]]은 [[하나회]] 소속이면서도 12·12 군사 반란에 반대하였고, 결정적으로 [[전두환]]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결국 [[1982년]] [[중장]] 예편 후 노태우 정권 말기인 [[1992년]]에야 [[민주자유당]]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김복동이 상술한 역쿠데타의 주역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후 2021년 9월 16일에 역쿠데타를 주도했던 장군이 밝혀졌는데, 당시 국방부 방산차관보였던 육사 8기 이범준 중장이 미국 측에 역쿠데타를 제의했던 사실이 밝혀졌다 * 12·12 사태 10년 후인 1989년 12월 12일에 대대적인 증시 부양책이 발표되었다. 1989년 4월 1일 1009P를 고점으로 코스피 지수가 하락세를 띠었고 증시 침체가 가속화되자 투신권을 동원해서 무제한 매입을 시켰는데 덕택에 일시적으로 코스피 지수가 900P선을 다시 넘기도 했다. 그러나 약빨은 오래가지 못해서 결국 1989년 증시는 908P선으로 1985년 이후 전해 대비 하락세를 보였던데다가 다음 해에 주식시장은 거하게 망해서 600P선까지 밀려났다. 덕택에 증권가에서도 흑역사로 치는 사건이다.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평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내걸었을 때 하나회로 이루어진 군 상층부에서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당시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던 일을 상기시켜서 반대여론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작전권 환수에 대한 의지는 박정희 정권 이후로 쭈욱 있어왔지만 공약으로 내걸고 공론화 시킨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었다. 실제로 평시작전통제권이 환수된 시점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이다. * 전두환의 반란군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휴전선에 배치된, 정확히는 노태우가 지휘하던 9사단의 2개 연대[* 정확히는 29연대와 30연대 1개 대대]를 빼냈다. 그리고 이들이 출동하며 상황보고가 상부로 전해졌는데, 당시 3군사령관이던 [[이건영]] 중장은 이를 저지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은 노태우의 명령만을 따르며 사령관에게 병력 이동은 없다는 거짓 보고를 했고 사령관을 철저하게 기만함으로써 진압군 측의 저지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드라마의 해당 장면에서는 이건영-구창회 실제 통화 육성을 그대로 사용하여 당시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 12·12 군사반란 당시에 보안사에서 전화 통화 내용을 녹음했던 테이프가 있다. 한 기무사 직원이 녹음 내용을 듣던 중 12·12 사태 당시 [[이건영]] 3군 사령관이 신군부에 대항하여 '병력을 출동시키지 말라'고 말한 것을 듣고 감복하여 이건영 장군에게 녹음 테이프를 넘겼고, 이를 한 일간지 기자를 통해 1995년에 [[월간조선]]이 입수해서 9월호 부록으로 공개하였다.[[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503100029|#]] 지금도 [[조갑제닷컴]]에서 들을 수 있다. [[http://www.chogabje.com/vod/audio_1212_a.asp|듣기]] * 12·12의 주요 사건들이 벌어진 장소는 수경사 30, 33경비단이 있던 [[경복궁]] 앞, [[참모총장]] [[공관]]이 있는 [[한남동]], 국방부, 육군본부, 보안사 분실이 있던 '''[[용산구]] 지역'''이었다. 그런 관계로 유사시에 대비, 잔여 병력 차단을 목적으로 12일 밤 10시 계엄군은 한남동 주변 [[한남대교|제3한강교]]를 비롯한 모든 한강 다리들을 접수한 후 '''차량 통행을 일제히 금지'''시켰다. 때문에 [[야간통행금지]] 시간을 앞두고 서둘러 한강 건너 퇴근하려던 시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엄청 큰 불편을 겪었다고 하며 다음 날 아침 정승화 총장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번 놀랐다고 한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912130032920101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9-12-13&officeId=00032&pageNo=1&printNo=10525&publishType=00020|#]] 차량 통행이 전면 금지되자 각 한강다리 앞 뒤에 묶여있던 시민들은 그 추운 날씨에 걸어서 다리를 오갔으며 자정 넘어 통행금지 시간이 되자 집에 가지도 못하고 여관방 신세를 지는 등 고생 좀 했다고 한다. 다만 반란이 성공하자 이례적으로 한강 교량만 야간 통행금지를 풀어줘서 묶여있던 차량이 다니게끔 조치했다고 한다. * 반란군(군사반란 책임자)들은 50세를 일기로 사망한 [[백운택]][* 1982년 1군단장 취임 직후 사망.], 70세에 사망한 [[유학성]][* 1997년, 재판 도중에 사망하여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 80세를 넘겨서 [[장수]]한다거나 죽더라도 80세 넘어서 별세한 것이 특징이다. 사실 완전히 우연은 아닐 수도 있는 것이, 기본적으로 건강하고 체력 좋은 육사 출신 장교들이었던 데다, 하나회 가입 조건 중 하나가 우수한 육사 성적이었는데 사관학교에서 체력이 나쁘면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없으므로 그중에서도 특히 더 체력이 좋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당장 두 주동자인 전두환과 노태우부터가 육사 동기들 중 체력으로 1, 2위를 다투었다고 한다. 특히 전두환은 미국으로까지 유학가서 미육군 특수전학교와 레인저스쿨을 수료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다녔다. *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후보 중 한 명인 [[유승민]]은 이 당시 [[김진영(군인)|김진영]]이 지휘하던 33경비단 소속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다. 물론 일개 병사 신분이라서 무슨 영향을 끼친 것은 전혀 없었다. 당시 유승민은 여자친구(현 아내인 오선혜)의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근처에서 복무하고 싶다는 이유로 당시 [[장포스]]로 유명한 [[장태완]] 장군이 엄격한 군기와 강한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알려졌었던 수도경비사령부에 자원해서 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유승민의 동기들은 유승민이 근무했던 그 시절의 수경사는 장태완 장군의 영향으로 군기가 엄했기 때문에 굉장히 빡센 군생활을 했었다고 평했다. 당시 장태완 장군 밑에서 일하던 자들의 수기를 보면 확실히… 오죽했으면 대선 당시 유승민의 편을 든 수경사 동기들이 유승민은 특전사 출신인 [[문재인]] 못지않은 빡센 훈련을 받았던 자라 문재인 후보에게 군 쪽으로 꿀리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로 장태완 장군 시절의 수경사의 엄격한 군기와 강도 높은 훈련이 장난 아닌 수준이었다고 한다.] 일등병 시절 평소처럼 군대에서 지내다 동기들에게 아군 간에 충돌이 일어나 특전사령관은 잡혀가고 이를 막으려던 특전사 장교가 사망했으며, 장태완 장군이 막으러 갔다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다음 날 [[노태우]]가 그 자리에 새로 취임했었다고 한다.[* 묘한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닌데, 신임 수경사령관인 노태우가 자녀(시기상 [[노재헌]]으로 추정)의 [[과외병]]을 뽑으려고 똑똑한 병사들을 추렸을 때 후보들 중에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중 입대한 유승민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당사자의 극구 거부로 과외병 자리는 다른 병사에게 돌아갔다고.] 이후 유승민은 [[김오랑]]의 보국훈장 추서를 추진해서 실현시켰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김오랑 기념사업회에게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 육참총장 관리관 반일부 준위는 사건 이후 딱히 처벌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일단 공관이 함락된 것을 해병대에 전화한 사실 때문에 눈칫밥을 먹었는지 사건 후 소리소문없이 전역해 [[택시]]를 몰며 살았다는 후문이 있다. * 사건 40주기인 '''2019년 12월 12일'''에는 [[최세창]], [[정호용]] 등 쿠데타 주역들[* 다들 전 前 대통령을 각하라고 높여부르며 윗사람 대우를 했고 정호용만 '두환이'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둘이 사적으로는 육사동기인데다가 5공 내내 요직을 시킬 정도로 친한 친구사이여서 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리고 [[김장환]] 목사 내외와 함께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고급 중식당에서 인당 20만원씩 하는 호화만찬을 즐기는 모습이 공개되었다.[* 코코넛 [[제비집]], 양등심 [[탕수육]] [[샥스핀]], 와인 등이 포함된 고가의 메뉴이다. [[불도장]]을 세트와는 별개로 주문하기는 했으나 테이크 아웃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불도장]]은 좀 빠르게 준비하라고."~~] 반면 [[노태우]][* 다만 노태우는 지속적으로 5.18 관련해 사죄한다는 표현을 하고 있어서 다른 12·12 주모자들과는 선을 사실상 긋고 있다. 게다가 본인부터가 이미 오늘내일 할 정도로 골골대고 있던 상태이기도 했다.]와 이미 사망한 자들을 제외한 쿠데타 주역 대부분이, 하필 12·12 쿠테타 40주년이 되는 날 옛 부하들과 모였다는 점에서 영상을 촬영한 [[정의당]] [[임한솔]] 부대표는 만찬장을 나오는 전두환에게 쿠데타기념회가 아니냐고 질문했지만 전두환은 단순 친목회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임 부대표는 알츠하이머라는 전두환이 줄곧 큰 목소리로 대화를 주도했으며 [[각하(호칭)|각하]] 소리까지 나왔다는 얘기까지 덧붙였다. 이에 5.18 관련 단체들은 반성 없는 뻔뻔한 태도에 경악하여 비난성명을 내고 여론도 꾀병으로 법원을 농락하는 전두환을 제대로 법정에 세울 것을 촉구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